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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최적화된 배우캐스팅

이 영화에는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사실상 이야기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설화학자인 '알리세아'와 램프의 요정 '진'. 각각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가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램프의 요정이 들려주는 3000년에 걸친 고대설화라 역사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환상에 가깝습니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이지만, 역시 영화는 눈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기에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그 영화를 구성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틸다 스윈튼과 이드리스 엘바는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이 영화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에 분위기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틸타 스윈튼은 유난히 판타지에 잘 어울리는 배우인데, <콘스탄틴>에서 천사 역할을 맡았을 때도, <나니아 연대기>의 마녀 역할을 맡았을 때도 그녀는 분명히 실존하는 인간이면서도 기묘한 신성함을 풍기는 사람입니다. 유난히 하얀 피부 때문인가 싶지만, 백인이 피부가 하얀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니 그녀가 가진 신비로운 이미지는 그녀만이 가진 배우로서의 아주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녀가 환상의 영역이 아닌 현실의 영역을 담당하는 인간의 역할이지만, 그녀가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인지 현실적이고 의심이 많은 성격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마주하는 램프의 요정과의 투샷이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습니다. 그녀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상대 배우가 이드리스 엘바입니다. 이 배우가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토르>였습니다. 그는 '헤임달' 역할을 맡았습니다. 강력하고 충직하며 지혜로운 수문장.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깊은 눈빛과 카리스마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배우였습니다. 

덕분인지 제가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 두 사람이 함께 찍은 포스터 때문이었습니다. 저 신묘한 분위기의 포스터를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까요. 거기다 제목이 300년도 아니고 3000년의 기다림인데. 

 

사실 이것은 3000년의 외로움

영화의 플롯은 심플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램프의 요정에게 빌 수 있는 3개의 소원. '알리세아'는 우연히 램프의 요정이 담긴 유리항아리를 얻게 되고, 유리항아리를 문지르자 램프의 요정 '진'이 나와 세 개의 소원을 빌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당장 램프의 요정을 만난다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3개의 소원을 말할 수 있는데, 우리의 주인공 '알리세아'는 의심하고 의심하며 쉽게 소원을 빌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다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사실 이 지점부터 판타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원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얼마나 존재할까요? 제가 너무 속물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원을 빌지 않는 알리세아를 설득하기 위해 진은 과거에 자신이 어떻게 램프에 갇히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자신의 램프를 손에 쥐었던 3명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매력적인 이야기들이긴 했지만 사실 저는 이 3000년의 스토리 자체에는 큰 감흥이 없었습니다. 성서를 통해 익숙하게 들어왔던 지혜의 왕 솔로몬에 의해 진은 램프에 갇히게 됩니다. 사실 성스러운 이야기에 등장하던 왕이 시바의 여왕과 정사를 벌이는 장면은 나름 충격적이었습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으로 살게 된 진은 그 사람이 자신의 자유롭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어야만 그 램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천민의 신분으로 왕자의 사랑과 권력을 갈망했던 여자,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던 잔혹한 독재자였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은 왕, 영민했으나 첩의 신분이었기에 남편의 욕정을 해결해 주는 역할밖에는 할 수 없던 여자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얻었으나 끝내 감당하지 못하고 모든 걸 잊게 해 달라는 이야기까지. 3000년을 지나며 소원을 들어줬지만 진은 자유로워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진'은 마지막에 만난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 여자의 소원으로 인해 '진'은 그 여자의 기억 속에서까지 잊히게 됩니다. 

 

현실에 있으면서도 꿈속에 있는 것 같은 이야기

이 영화에 부제를 지을 수 있다면 '대낮에 꾸는 꿈'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램프의 요정이라는 환상적인 존재가 등장하지만, 영화는 현실의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진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알리세아는 진에게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에서 알리세아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해 그다음 이어지는 두 사람의 육체적 교감이 꽤나 곤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장면의 미학으로는 아름답고 신비로웠으나 뭐랄까 지나가다 길에서 만난 매력적인 낯선 남자와 한 여자가 갑작스럽게 원나잇을 하는 것은 훔쳐보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전제조건은 정말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한 상태로요. 내가 딛고 있는 땅이 아래위로 심각하게 요동치는 취기 속에서.

남편의 외도로 이혼 후 쭉 혼자 지내왔던 알리세아는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알리세아는 진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오고. 진과 함께 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갑작스레 이방인을 모욕하는 영국인들의 모습이 뜬금없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전체 맥락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후반부부터는 이성으로 이해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녀와 그의 외로움을 공감해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그 둘은 분명 지독하게 외로운 두 존재들이었고, 알리세아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설화학자였기에 이야기를 통해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녀에게는 절대 개연성이 없는 감정의 흐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면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라는 것이 결코 이성의 영역은 아니기에 굳이 어떤 개연성을 필연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3000년의 외로움 속으로 나의 외로움을 집어던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이질감이 듭니다. 외로움과 외로움은 사실 서로를 보듬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렇습니다. 결핍이 있는 상태에서 결핍을 끌어안는 것은 가끔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를 '3000년의 기다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고, 진을 자유로이 돌려보내고, 다시금 현실인지 꿈속인지 모를 공원에 앉아 진을 기다리는 알리세아의 모습은 분명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둘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아닌 여전한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서로에게 기대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은 사실 꽤나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혼자라는 시간을 잃게 되면 가끔 정말 고장이 나니깐요.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꽤나 아름답고, 꽤나 고풍스러운 영화였습니다. 독보적인 분위기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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