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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북
그린북

인간의 본성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인종차별이라는 비열함

영화의 제목인 <그린북>은 한참 인종차별이 심하던 시기, 흑인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장조나 정보 등을 제공했던 책이었습니다. <그린북>의 '그린'은 색깔이 아닌 출판인의 성입니다. 굳이 의미를 담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그린'이 가진 색상의 이미지가 더해져 영화를 바라보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흑'과 '백'의 세상이 아닌 따뜻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다 같이 둘러 모인 사람들의 모습으로 끝나는 결말과 연결되어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62년으로부터 60여 년이 흐른 지금, 인종차별자는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겼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자들은 존재합니다. 사실 인종차별자라는 단어는 지금 시대에는 좀 거창하게 느껴질 정도로 '요즘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냐'는 시대가 되었지만, 사실 모든 차별은 인종차별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별이라는 것은,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의 입장이 더 유리할 때, 더 불리한 쪽을 깎아내림으로써 내가 더 유리한 위치를 공고히 차지하도록 하는 정치적인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보통 그것은 인간의 특성을 단순화시켜 일반화하고 이분법으로 나누어 사람의 특성을 좋거나 나쁘거나,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나눕니다. '인간'의 특성을 하나의 단어로 만들어 구겨버리는 것이 차별입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잔인한 방법. 보통 그것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차별'을 통해 '손쉽게' 이득을 얻고자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비열한 정치질에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인간은 쉽게 휘말려 이득을 취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작고도 분명한 변화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며, 흑인 셜리가 흑인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은 남부 순회공연을 한다는 것입니다. 셜리가 남부에서 공연을 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토니를 채용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백인의 사회에서 백인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흑인. 무대 위에서는 박수를 받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천대받는 존재. 사실 저는 우아한 클래식을 연주할 뿐, 셜리의 존재는 동물원의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달려드는 모든 차별에 대해 셜리는 우아하고 차분하게 대응합니다. 마치 조용하고 평화롭게 시위를 하는 순교자처럼 순회공연을 하던 셜리가 어디에서도 깨부수지 못하 차별을 깨부순 지점은 토니였습니다. 흑인들이 사용하던 잔을 그냥 쓰레기통에 내버릴 정도로 '무의식적'인 차별을 하던 토니와 셜리는 여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친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셜리의 여정이 없었다면, 셜리가 편안하게만 여행하고자 했다면, 셜리는 토니는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의 평화로운 순례는 토니라는 친구를 얻음으로써 그의 인생에서, 그리고 이 영화로써 새롭게 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걸렸지만, 분명히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어떤 하나의 인식이 변하는 데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 인식을 변하게끔 하는 사건은 커다란 사건이기도 하지만, 실상 이렇게 한 사람의 여정, 한 사람의 삶과 그의 인간관계들이 결국은 많은 것들을 바꿔나간다고 생각됩니다. 셜리와 토니의 실제 인물들은 평생 가깝게 지내다 2013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들이 친구가 되어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사회는 분명하게 변화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언젠가보았던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나르시시스트와 관계가 얽힌 사람들 중 심한 경우는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가스라이팅하며 상대의 의견이나 취향 같은 것들을 쓸모없고 의미 없는 것들로 만들어버립니다. 자기 결정권을 없애버리고, 나 자신이 가치 없는 인간이라 나르시시스트의 말을 따라야만 된다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내 의견과 생각, 감정이 가치 없는 것이라고 느껴지게 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도 중요하지만, 내 의견과 내 감정이 존중받고 가치가 있을 때 살아갈 힘이 생기고, 그것이 존중받을 때 내 두 발을 딛고 설 땅이 생깁니다. 인종차별이 희미해진 자리에는 이런 이상한 관계들이 또 암세포처럼 자라나고 있습니다. 내 이득과 우월감을 위해 차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러나 이 영화에서 셜리와 토니처럼 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서로의 삶은 충만하고 다양해지며 서로를 완성시켜 간다고 생각합니다. 나르시시스트만 살아남은 세상을 상상해 보면 황폐한 전쟁터 같은 삶이 떠오릅니다. 흑인 음악을 모르던 셜리가 토니와 함께 허름한 클럽에서 연주를 할 때, 셜리 본인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하게 되며 새로운 장을 열어나갈 때. 그 장면은 정말 아름답고 행복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서로 존중하며 상호 작용해 나갈 때 더 위대한 한 걸음을,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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